창세기 31장
이 장에 대한 메모
라헬은 왜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쳤을까?
창세기 31장 19절은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였더라"고만 말하고 이유는 밝히지 않는다. 드라빔은 집안에서 모시던 작은 신상(가정 우상)으로, 라반이 "내 신"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31장 30절) 라반 집안이 실제로 섬기던 우상이었다. 라헬이 왜 그것을 가져갔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1. 상속권과 관련된 물건이었다는 해석
고대 근동의 누지(Nuzi) 문서에는 가정 신상을 가진 사람이 집안의 상속권이나 가장 지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라헬은 아버지가 딸들에게 주어야 할 몫을 가로챈 것(31장 14~16절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 버렸다")에 대한 보상으로, 또는 야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드라빔을 챙긴 것이다. 다만 이 문서를 성경 본문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2. 아직 우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해석
라헬은 우상을 섬기는 집에서 자랐다. 야곱과 20년을 살았어도 마음 한편에 옛 신앙이 남아 있어, 먼 길을 떠나며 보호와 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드라빔을 가져갔을 수 있다. 실제로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명령하고 그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은 일(35장 2~4절)은, 야곱의 집안에 여전히 우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3. 아버지가 점을 쳐서 뒤쫓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해석
드라빔은 점을 치는 데 쓰였다(에스겔 21장 21절, 스가랴 10장 2절). 라반 자신도 "내가 점쳐 보니"(30장 27절)라고 말한 사람이다. 라헬이 아버지의 점치는 도구를 없애 버려 도망가는 길을 알아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해석이다.
4. 성경이 드라빔 사건을 다루는 방식
이유가 무엇이든 성경은 이 일을 좋게 보지 않는다. 야곱은 "누구에게서 당신의 신을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라"(31장 32절)고 말했는데, 이는 자기도 모르게 라헬에게 내린 저주가 되었다. 라헬은 낙타 안장 밑에 드라빔을 감추고 "생리 중"이라 핑계 대며 아버지를 속였다(31장 34~35절). 라반이 그토록 찾던 "신"이 여인이 깔고 앉은 안장 밑에 있었다는 장면 자체가, 그 신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보여 주는 조롱이기도 하다.
그리고 라헬은 오래지 않아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다(35장 16~19절). 성경이 이 둘을 직접 연결하지는 않지만, 드라빔을 묻은 사건(35장 4절) 바로 뒤에 라헬의 죽음이 나오는 배열은 의미심장하다. 이 이야기는 야곱의 집안이 하나님만 섬기는 집으로 정리되기까지, 오랜 세월 이방 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야곱은 왜 몰래 도망쳤을까?
창세기 31장 3절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런데 야곱은 라반이 양털 깎으러 간 틈을 타 "라반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다"(31장 20절).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당당하게 떠나지 못했을까?
1. 라반이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야곱은 이미 한 번 정식으로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요셉이 태어난 뒤 "나를 보내어 내 고향으로 가게 하소서"(30장 25~26절)라고 했으나, 라반은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깨달았다"며 붙잡았다. 야곱은 라반 덕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라반이 야곱 덕에 부자가 된 것이었고, 라반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정식으로 요청해도 놓아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2. 라반이 아내와 자식, 재산을 빼앗을까 두려웠다
야곱 자신이 이유를 말한다. "내가 이르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생각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31장 31절). 당시 관습으로는 딸과 손자들, 그리고 야곱이 품삯으로 얻은 가축이 여전히 라반의 집안 소유로 여겨질 여지가 있었다. 라반은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꾼 사람이었고(31장 7절), 딸들도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 돈을 다 먹어 버렸다"(31장 15절)고 할 만큼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실제로 라반은 뒤쫓아 와서 "딸들도 내 딸이요 자식들도 내 자식이요 양 떼도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31장 43절)고 말한다.
3. 야곱의 오래된 습관 —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 꾀로 빠져나감
야곱은 형의 장자권도 죽 한 그릇으로 샀고, 아버지의 축복도 속임수로 받았으며, 라반과의 가축 문제도 나뭇가지 꾀로 풀었다. 그는 문제 앞에서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꾀를 써서 피해 가는 사람이었다. 20년 동안 속이는 장인 밑에서 산 세월이 이런 성향을 더 굳혔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 약속에 온전히 기대지 못하고 자기 방식을 보탠 것이다.
4. 그럼에도 하나님은 약속대로 지키셨다
야곱이 몰래 떠났어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라반이 사흘 만에 알고 이레 길을 뒤쫓아 왔을 때, 하나님은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31장 24절)고 막으셨다. 라반은 힘으로 야곱을 해할 수 있었지만(31장 29절) 손을 대지 못했다. 야곱의 두려움과 비겁함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이루신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야곱의 믿음이 아직 온전하지 못했음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런 야곱을 하나님이 어떻게 붙드셨는지를 보여 준다. 야곱이 당당히 하나님만 의지하며 걷게 되는 것은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다리를 절게 된 뒤의 일이다(32장). 라반에게서 몰래 도망친 야곱과 에서에게 절뚝이며 나아가는 이스라엘 사이에, 그 밤의 씨름이 놓여 있다.
